"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본 도호쿠 지방을 덮쳤다. 다음 날 후쿠시마의 도쿄전력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십수만 명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사고 지점 반경 20㎞ 이내는 출입 금지 구역이 됐다. 동물들 역시 방사능에 노출됐다.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여 소를 죽이지 않고 먹이를 주는 목부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이제 '희망 목장'이라고 부른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제외하곤 2011년아이폰주식거래 이후 매년 빠짐없이 후쿠시마를 방문했던 정주하 작가는 희망 목장의 검은 소들을 렌즈에 담았다. "소들이야말로 인간의 과오를 증명해 줄 마지막 증언자"라는 생각으로다. 2년 전 별세한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이 그의 사진을 보고 소설과 함께 엮는 작업을 제안했다. 소설가 백민석·황모과가 정 작가의 사진 연작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각기 썼고, 그 결과물이 '사포션 진소설' 형식의 책 '파라-다이스'에 담겨 최근 출간됐다.
파라-다이스·정주하 백민석 황모과 지음·연립서가 발행·216쪽·2만5,000원
인간이 떠난 폐허에서 소들은 계속 산다 주식유망업종 '파라-다이스'는 정 작가가 찍은 희망 목장 소 사진 연작에 붙인 제목이기도 하다. 거부 혹은 확장(~을 넘어)을 뜻하는 그리스어 접두사 '파라'(para-)에 '죽음'(dies)을 합친 말이다. 책을 펴낸 연립서가의 최재혁 대표는 '편집 후기'를 통해 "피폭으로 살처분 명령이 내려졌지만 생명을 얻게 된(죽음을 거부하거나 넘어선) 소들의 역설적인 파라다이전환우선주 스"라며 "인간의 과오로 고기가 될 운명에서는 벗어났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거부(추방)당한 아이러니"라고 설명했다. 현재 희망 목장은 목장 일꾼 중 한 명이었던 요시자와 마사미가 홀로 남아 피폭된 소들이 자연사할 때까지 돌보고 있다. 소들에게 깊이 감정 이입한 황모과 작가는 '죽지 못하고 죽지 않고 죽을 수 없는' 소에 대한 이야기인 '마주식투자기법 지막 숨'을 썼다. 불과 1, 2년을 살다 도살당하는 보통 소들과 달리 소설 속 목장 소들은 800년 넘도록 사는 불로불사의 존재가 됐다. 2011년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도살자인 인간이 목장을 떠난 후로다.
일본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의 한 노인 요양 시설 벽에 걸린 시계가 원전 사고 이후 10개월이 지나서도 변함없이 시간을 재고 있었다. 벽의 검은 자국은 지진해일이 덮친 흔적이다. ⓒ정주하 작가
죽음이 없는 이곳이 소들에게는 과연 낙원일까. 영생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원전 오염수가 대량 방류된 후 피폭된 인어 고기가 든 배합사료를 소들이 먹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널리 퍼져 있는 인어 고기를 먹고 800년을 살다 동굴에 들어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비구니 전설을 빌려 썼다. 황 작가는 "전설 속 인어들도 유해물질의 생물농축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단 생각을 하며 정 작가의 사진 속 소들을 의인화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소들이 우리에게 계고하는 것은 무엇일까 2023년 제2원자력발전소마저 녹아내린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백민석 작가의 '검은 소'는 실재와 환상, 현실과 미래를 오간다. 다큐멘터리 '방사능 벨트'를 준비하는 '나'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죽음의 땅'으로 도망친 재일조선인 여성 게이코와 저궤도 위성 화상통신 단말기로 소통한다. 둘의 접선 장소는 마을 경계에 있는 우체국. 게이코는 '나'가 우체국에 둔 단말기를 가져다 피폭된 땅과 그곳에 남은 사람들을 찍고 다시 우체국에 갖다놓는다. '나'가 맥주를 마시면서 오타니 쇼헤이가 출전하는 야구 중계방송을 볼 때 게이코는 목에서 피를 토한다.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가 방류됐던 인근 바닷가에서 일본 청년이 서핑을 즐기며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정주하 작가
두 편의 소설은 인간에게 한없이 치명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색무취의 방사능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두 작가 모두 원고를 의뢰한 당일 바로 작업을 수락했다고 한다. 소설이 완성된 건 지난해 11월. 두 편의 소설과 함께 정 작가의 사진과 작업 노트인 '미나미소마 일기'도 함께 책으로 엮였다. 소설의 앞뒤로 붙은 흑백 사진을 지나 '미나미소마 일기'와 함께 실린 사진은 컬러로 전환된다. 특히 원전 굴뚝을 뒤로 한 채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청년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오염수 방출로 전 세계의 불안을 사는 이곳 바다에서 "각성 없이 일상의 행위를 즐기는" 데 대해 정 작가는 우려를 표한다. 인간이 떠난 폐허에서도 소들은 계속 살고 있다. 그는 이 소들이 우리에게 계고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문한다. "이들이 계속 이곳에 살면서 어떤 변화를 불러올 것인지 생각하고, 이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인간의 과오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