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적보산이 보이지 않는다. 짙은 안개에 덮여버렸다. 겨울이 왔다는 뜻이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포도나무를 덮어줄 짚을 얻을까 해서 나갔더니 올해는 힘들겠다고 한다. 타작하면서 다 잘라서 논에 넣어버리고 메주 맬 때 쓸 짚만 조금 남겨서 말리는 중이란다. 겨울 포도밭을 덮어줄 볏단이 없다니 농사꾼 남편이 실망하겠다 싶어 눈앞이 캄캄해진다. 망연자실 서 있는데 삼거리 농산물 집하장 지붕에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벌써 난롯불을 피웠구나. 남자 셋이 난롯불 위에 알밤을 올려놓고 도토리묵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한잔하고 가시지.” 나를 부 특수관계자 범위 른다. 내 동년배, 동네에서 가장 젊은 60대들이다. “저 지금 조금 바빠요” 하면서도 한잔 받아 마신다. 남자들은 슈퍼에서 산 도토리묵을 먹으며 뒷산 도토리나무 이야기를 한다. 동네 뒷산 도토리나무는 고개를 쭉 빼고 저 앞 벼 들판을 보는데, 벼가 잘돼 풍년이면 도토리를 적게 달고 벼가 흉년이면 도토리를 수북하게 단다고, 진짜 그렇다고 부동산계산기 우긴다. “우리 엄마는 물론 우리 마누라도 도토리를 그렇게 주우러 다녔는데 이젠 도토리 같은 건 안 줍지. 한번 가면 한 포대씩 짊어지고 내려왔는데.” 그때 도토리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뒷산에는 도토리가 수북이 떨어져 있다고 아쉬워한다. “직접 주우러 가시지 그래요.” 내 말에 그냥 힝, 하고 콧바람 소리만 낸다. 슬그머니 빠져나와 디딤돌 방공제 산 쪽으로 걸어가니 이웃 할머니가 마늘을 심고 있다. 땅에 고랑을 내어 마늘을 한 쪽씩 줄지어 넣고 흙을 덮는다. “이거 끝나면 이제 양파를 심어야지. 올해는 진짜 몇 톨만 심을 거야. 힘들어.” 무슨 일인지 올해는 배추 농사도 망쳤고 무 농사도 망쳤다고 한다. 고구마는 잘됐다고 한다. “좀 줄까?” 하더니 일어나 유모차를 밀고 집으로 들어간다. 히트론 고구마를 한 자루 들고 위로 올라가니 마늘 심던 할머니의 친구 할머니가 파를 뽑고 있다. “내일부터 더 추워진다니 뽑아야지. 도무지 못 자랐네. 이것밖에 안 돼. 필요하면 가져가.” 아들이 파전을 좋아하니 잔잔한 것이 전이나 부치면 되겠다고 한다. “아들은 뒷산 도토리로 만든 묵이 먹고 싶다고 하던데요.” 삼거리 난롯가에서 알밤을 구워 먹고 있는 1년 적금 이자 아들 말을 전하니 눈을 깜박깜박한다. “이 몸으로 무슨 도토리를 줍나.” 아들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도토리를 주울 수 없다니 상심한 얼굴이다. 상찬이네가 오늘 무청을 다 뽑아 왔다니 무청이나 엮으러 가자고 한다. 유모차를 밀며 올라가니 마당에 마루에 무청이 한가득이다. 내 눈에는 무청보다 무청을 엮는 짚이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둘이 볏짚으로 무청을 잘도 엮는다. “요렇게 요렇게 잘 보라고.” 무청 몇 줄 엮고 나니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난롯가 60대 어린 남자들은 아직도 알밤을 구워 먹으며 노닥이고 있다. “아들아. 그만 들어가서 파전이나 해먹자.” 유모차를 잡고 선 80대 여인이 딱지치기에 빠진 어린 아들 데리러 온 젊은 엄마 같다. “아쉬운 대로 파전이나 먹어볼까.” 남자들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포도밭 언덕으로 뛰어간다. 언덕 너머 집 뒤로 노을이 넘어가고 있다. 겨울 노을은 더 붉다. 다음주면 모든 풀이 얼어서 넘어지겠지. 충주 수안보면 수회리의 겨울 풍경이 시작됐다. 글·사진 신이현 작가 *‘농사꾼들’에 소설가이자 와이너리 ‘작은 알자스’ 대표인 신이현 작가가 합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