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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가신이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별세, 그 너머에 살아 숨쉬는 발자취를 한국일보가 기록합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사회부는 전원 출근해주세요. 인명피해 확인 빠르게 부탁드려요. 저도 출발합니다."
지난해 12월 휴일의 아침, 사회부장 지시를 신호탄으로 KBS 광주방송총국 보도국 단체 대화창이 쉴 새 없이 깜박였다. 전남 무안국제공항에 여객기가 추락했다는 속보가 뜬 직후. 마침 당번이던 손민주 기자는 떨리는투자유망종목
손으로 전화기를 붙잡았다. 소방당국에 확인을 해야 했다.
"방콕발 제주항공, 착륙 중 화재 발생, 두 명은 구조, 불은 아직."
간단한 내용은 더없이 무거웠다. 손 기자는 잠시 숨을 멎었다. 그리고 물어야 했다. "다른 승객들은요?"
현장으로 달려가며 1보를 썼다. 갈대밭 너머로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미래컴퍼니 주식
. 연기 사이로 얼핏 보이는 비행기체는 꼬리만 남아 있었다. 불안이 스쳤다. 며칠 전 선배가 떠난 휴가지는 하필 방콕이었다.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 오늘 오는 날 아니죠?" 그때 중계 불이 켜졌다. 현장 상황을 전해야 했다. "네, 저는 지금 항공기 추락 사고가 발생한 무안국제공항 인근에 나와 있습니다." 선배는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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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단체 대화창에 한 줄 공지가 떴다. "탑승자 명단에 김애린이 있습니다." 대화창 안 누구도 말을 잇지 않았다. 손 기자는 다음 중계를 이어갔다. "강한 충격 탓에 꼬리 쪽을 제외하곤 형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계 불이 꺼질 때마다 한숨이 왈칵 터졌다. 원래 가려던 곳은 호주였는데. 방콕으로 휴가지를 바꿨다면서 "부쌍용차 주식
자가 된 기분"이라고 웃고 있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그날 종일 7번의 생방송이 돌았다.
밤 11시가 돼서야 울음이 쏟아졌다. 사무실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너를 보내면 안 됐는데." 다른 선배들 목소리가 숙인 고개 위로 번져 나갔다. 맞은편 책상엔 선배의 취재수첩이 놓여 있었다. 붕어빵 노점상의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었다. 이날 '전10일선
원 출근' 메시지를 끝내 읽지 못한 유일한 기자, 김애린 KBS 광주방송총국 기자가 2024년 12월 29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숨졌다. 향년 30세.
2024년 12월 29일 KBS뉴스특보가 무안국제공항에서 벌어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소식을 전하고 있다. KBS 뉴스화면
아파본 이들의 이름, 애린
김경학·임정임 작가는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열댓 명 가족이 사색이 된 얼굴로 부부를 맞았다. 구급차가 쉼 없이 요란스레 들어갔지만, 나오는 차는 보이지 않았다. 딸 애린이는 도착했어야 할 시간을 한참이나 넘겼다.
1.7㎏, 작고 여린 아이였다. 민중미술가인 부친은 김지하 시인의 '애린'을 먼저 떠올렸다. 언덕 애(厓), 기린 린(麟). 도망가다 뒤돌아보는 기린과 사슴, 그리고 노루, 멈춰 선 이의 이름이었다. 딸은 대학생이 돼서야 어원을 물었다. "모든 여인의 이름, 가장 낮은 곳에 내려가 본 이들의 이름이지." 아빠의 답에 딸은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빠는." 한복을 입은 어린 애린이 모델이 돼 주면, 모친 임 작가는 애린을 닮은 조각상을 빚었다. 나주평화의소녀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학교에 갈 때마다 교사들의 딸 칭찬에 엄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늦은 밤 179명에 달하는 사망자 명단이 공개됐다. DNA 채취 후 닷새, 이제야 시신 확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천막 안은 검은 그을음만 가득했다. "온전한 곳은 없습니까?"
두 손가락과 손톱 끝이 남아 있었다. 손톱은 빨간 바탕에 눈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모녀가 함께 한 네일아트였다. "조각하느라 맨날 흙 만지는 데 무슨..." 엄마가 망설이자 딸은 "엄마도 예쁜 것 좀 하고 살아" 하고 웃었다. "우리 애린이 맞아요."
부친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름을 잘못 지은 걸까. 도망가다 언덕에서 돌아보는 사슴은 죽는다던데. 낮은 곳에서 늘 뒤편을 돌아보며 살란 뜻이었는데, 너무 일찍... 우리 애린이."
고 김애린 KBS 광주방송총국 기자가 첫걸음을 떼던 날 부친 김경학씨가 그려 안방 입구 벽에 걸어둔 그림. 부친은 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나주=김혜영 기자
사람을 알게 한 무대의 시간
경희대 언론정보학과에 진학한 고인은 희망연극문화부에서 활동했다. 여름방학을 다 반납해야 하는 가을 공연, 겨울방학 내내 매진해야 하는 신입생 환영 공연, 모두 "빠지면 안 되는 배우"였다.
절친 이예진 프리랜서 PD는 청소노동자 역을 맡았던 고인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대걸레를 들고 대사를 연습하며 몇 달을 보냈다. "타인 시선으로 생각하는 법을 나도 모르게 배우는 것 같아."
노래는 포크음악 가수 권나무의 '거짓말은 없어요'를 좋아했다. 가사의 미학을 몇 번이고 설명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때에는 널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해요." 스물 넷 애린의 들뜬 얼굴을 떠올리던 이 PD는 울컥했다. "이제 애린이가 모르는 신곡이 생겼구나." 권나무는 지난달 4집 앨범을 냈다.
책임감이 강한 사회부 기자
기자는 2019년 KBS 광주방송총국에서 시작했다. 광주에서 발생한 아파트 외벽 붕괴 사고의 현장 등을 누볐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일제 강제동원 현안에 마음을 쏟았다. 연중 기획물 '영상채록 5·18'로 동료들과 5·18 언론상을 받았다. 구두닦이와 시민군 등 이름 없이 싸운 이들의 목소리를 생생히 담은 보도였다. 그는 수상 소감에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았다. "5·18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내다, 매년 5월 보도를 내놓는 게 면목이 없습니다."
이국언 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그를 '앉는 자세부터 다른 기자'로 기억했다. 양금덕 할머니가 일본 미쓰비시를 상대로 불법 강제노동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이어가던 시기. 취재를 위해 몰려온 기자들은 태도부터 제각각이었다. "어르신을 소개하면 애린 기자는 먼저 찾아뵙고 손잡고 여쭙고, 예의부터 다르구나." 이 이사장은 얼마 전 후원회원 명단에서 김 기자의 이름을 발견했다.
장헌권 광주 서정교회 목사도 김 기자를 잊지 못한다. 세월호 10주기를 앞둔 2024년 4월 순천교도소 면회실이었다. 세월호 유족을 제외하고 선장과 선원 등 참사 책임자 재판을 빠짐없이 방청했던 유일한 사람. 장 목사는 이준석 세월호 선장과 면회를 마치고 그의 옥중 참회를 전했다. 취재를 마친 김 기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목사님 긴 시간 감사했습니다. 광주에서도 연대의 현장에서 자주 뵈어요."
김 기자는 늘 탐사보도를 꿈꿨다. 하지만 역할과 상황은 늘 녹록지 않았다. "나 망했어. 그 아저씨, 거짓말이었어. 그런데 이분도 사정이 너무 딱해. 그래도 보도는 할 수가 없고. 아, 보고 다 해놨는데 정말 망했다."
마음이 복잡하고 흔들리는 날이면 부친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아빠, 저 아무래도 로스쿨 가야겠어요."
고 김애린 KBS 광주방송총국 기자는 2019년 1월 입사해 사회부 소속으로 현장을 지켰다. KBS 뉴스화면
"가슴에 별이 박히는 기분"
진심은 당연히 아니었다. 2024년 9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저널리즘혁신학과 1기로 입학했다. 정은령 세명대 교수는 지원서에서 읽은 그의 짙은 갈증을 기억한다. "부족한 인력 상황에 매일 15분 뉴스를 위해 1분 30초짜리 리포트를 만들었습니다. 자기 효능감은 바닥을 쳤고, 열정은 고갈돼 갔습니다. 돌파구를 찾고 싶었습니다. (중략) 하지만 '퇴사'는 진짜 제 마음이 아닙니다.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니까 핑계를 찾은 것이지요. '잘하는 기자'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팩트체크' 수업을 들었다. 현직자 대상 토요일 온라인 수업이었다. 한 학기 내내 탐구했다.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역사를 왜곡했다"는 일각의 주장을 검증할 때, AI와 지역기자 중 누가 더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AI는 빠르게 근거 자료를 취합했지만 구체성은 떨어졌다.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보고서 등엔 접근도 못했다. 의미 추출에도 서툴렀다.
이런 결론의 종강 발표에 정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왜 AI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여전히 기자들이 치열해야 하는가, 왜 지역의 역할이 중요한가. 중요한 통찰을 제시했습니다."
퇴사 이야기도 쏙 들어갔다. "일하면서 수업까지 들으려니 너무 바쁜데 정말 행복해. 마음에 별이 박히는 기분이야." 손민주 기자의 기억이다.
공부하는 기자가 세상을 바꾼다
안수찬 교수의 '내러티브 저널리즘' 수업도 들었다. 인물과 서사를 중심으로 이슈와 구조를 드러내는 보도를 꿈꿨다. 첫 아이템 발제 과제를 5개나 냈다. 고민을 거쳐 '달팽이 붕어빵' 아이템을 골랐다. 발달장애인 지원 노점이 이틀 만에 문을 닫은 사연이었다. 안 교수는 조언했다. "스무 곳 노점이 있다면 각각 어떤 이유로 붕어빵을 굽는지 들어보세요. 사람의 목소리로 지도를 그려보면 의미 있겠어요."
발품을 팔고, 결과를 간추려 2024년 12월 20일 '사라지는 붕어빵… 노점허가제 논의를' 보도를 방영했다. 1분 40초, 짧은 보도가 아쉬웠다. 그래도 배우는 기쁨은 충분했다. 지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수업 진짜 재미나. 유일한 내 낙이야. 안 교수님이 기자 인생에 빛나는 순간이 분명 온다고, 그 순간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고 함. 혼자 눈물 훔침."
그리고 붕어빵 보도는 김 기자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2025년 1월 7일, 고인의 장례식과 KBS 광주방송총국 노제가 엄수됐다. 노제에 참석한 안 교수의 눈에 고인 책상 위 알록달록한 키보드가 들어왔다. 일을 아끼는 사람만 고르는 물건이었다.
안 교수는 손 기자 등 몇몇 제자와 국밥·소주를 두고 마주 앉았다. "좋은 기사를 쓰겠다고 버티는 기자들 인생에 빛나는 순간은 반드시 옵니다. 김 기자는 아주 강렬하게 그 엔진을 찾으려고 애쓰던 중이었어요."
손 기자도 속으로 생각했다. "선배, 저 의연하게 일하는 법을 속성으로 배워버렸어요. 참사를 겪은 사람들이 다 하지 못한 말이 얼마나 많을지도요." 고인은 손 기자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드문 선배였다. "민주야, 우리 60세까지 버티며 재밌는 거 많이 하자." 그날 밤 하늘엔, 땅으로 내리고 하늘로 오르는, 하얀 눈이 가득했다.
고인의 친정 서재에는 재직 기간 현장을 누비며 받은 상패들이 소중히 보관돼 있다. 고 김애린 기자는 2024년 7월 연중 기획 보도 '영상채록 5·18'로 동료들과 5·18 언론상을 수상했지만 더 많은 탐사보도에 목말라했다. 나주=김혜영 기자
못다 찾은 답은 현장에 남았다
"엄마, 난 남자로 다시 태어나면 신부님이 되고 싶어." 꿈에라도 이루고 싶었을까. 너무 보고 싶은데 꿈에도 안 오던 딸이 임 작가 꿈에 비로소 보였다. 딸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애린아, 왜 검은 옷을 입었어?" 웃기만 했다. "엄마가 기도하고 있으니까. 너는 그냥 행복하게 잘 있으면 돼." 모친은 트라우마 상담을 받았지만, 여전히 새벽이면 가슴을 친다.
24일로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일어난 지 꼭 300일이 됐다. 유가족들은 아직 공항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올 4월 '12·29 여객기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진상규명 대책을 담지는 못했다. 유가족 협의회 요구사항은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조사위)의 국무총리실 이관 △독립 조사기구 구성 △유가족의 조사·검증 참여 보장 등이다. '셀프 조사' 논란 속 조사위는 "조종사의 과실"을 사고 원인으로 지목했다.
부친은 매일 아침 딸을 추모하고 향을 태운다. 딸이 취재 현장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실 규명이 이젠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됐다. "애린아, 아빠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될까. 오늘은 이야기 좀 해주렴."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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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비로소 부고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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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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