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가 세계 최초의 ‘치매 마을’로 알려진 네덜란드 호게베이크를 모델로 한 노인 돌봄 시스템을 추진하고 있다. 인구 고령화와 함께 치매 환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기존의 의료 중심 돌봄에서 벗어나 ‘삶의 질 중심’의 공동체형 케어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한 노인 요양 시설에서 음악회를 즐기고 있는 노인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로이터=연합뉴스


10일(현지 시각)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최근 워싱턴DC에서 열린 ‘도시 고령화 심포지엄’에서는 보건당국, 개발업자, 치매 전문가들이 모여 노인 주거 정책의 방향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주목받은 사례가 바로 호게베이크다. 네덜란드의 이 마을은 치매를 병이 아닌 ‘삶의 한 단계’로 바라보는 혁신적 모델로, 거주자들이 일상 생활을 이어가며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호게베이크에는 약 188명의 중증 치매 환자가 27개의 주택에 나뉘어 거주한다. 각 주택에는 간병인과 간호사, 활동 지원팀이 상주하며 주민들은 함께 요리를 하고 정원을 가꾸며, 마을 내 슈퍼마켓에서 장을 본다. 의료 개입은 최소화하고, 환자 스스로의 생활을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다. 엘로이 반 할 마을 공동 설립자는 “돌봄은 하루의 5%에 불과하며, 나머지 95%는 삶과 행복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델은 현재 캐나다, 호주 등지로 확산됐으며 미국에서도 조지아주 세렌베가 유사한 구조를 도입했다. 워싱턴DC에서는 시가 지원하는 플레처-존슨 중학교 부지 재개발 계획에 치매 마을을 포함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해당 프로젝트를 이끄는 오사마 수아디 개발자는 “기존의 시설 중심 치매 케어는 인간적인 온기가 부족했다 ”며 “질 좋은 식사와 주거 환경, 사회적 교류를 제공하면 공공 의료비 부담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비영리 단체 아이오나 시니어 서비스도 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하이브리드형 치매 마을을 별도로 의회에 제안했다. 한국계 준 방 대표는 300만달러 규모의 예산을 요청하며 “낮에는 주간 건강센터에서 생활하고, 밤에는 그룹홈에서 돌봄을 받는 구조를 목표로 한다”고 설명했다. 의회는 이 중 85만달러만 승인했지만, 방 대표는 “치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가 마주할 현실”이라며 사업 의지를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워싱턴DC가 미국에서 치매 발병률이 가장 높은 도시라는 점이 ‘치매 마을’ 모델 도입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봤다. 전체 노인의 약 16%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치매를 앓고 있으며, 특히 흑인 노인층의 발병 위험은 백인보다 두 배에 달한다. 고립된 삶, 만성질환, 의료 접근성 부족이 겹치면서 기존의 의료·시설 중심 돌봄만으로는 대응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이다.
샤론 하인스 워싱턴DC 노인복지국 국장은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 대부분이 심리적·경제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며 “지역사회가 함께 환자를 돌보는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간병인과 환자를 지역 의료·복지 자원에 연결하는 아이오나의 ‘치매 내비게이터’ 프로그램이 현재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라고 덧붙였다.
크리스티나 프래더 조지워싱턴대 뇌건강연구소 소장은 “검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의료와 주거, 지역사회가 통합된 고령자 친화형 커뮤니티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구축한 기존 시스템으로는 다가올 고령화 물결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워싱턴DC의 시도는 아직 초기 단계지만 ‘치매를 격리의 대상이 아닌 존중의 주체로 대한다’는 철학은 미국 내 노인 돌봄 정책 전반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반 할 공동설립자는 “치매를 치료할 수 없다면,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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